탄소배출권 거래제도는 온실가스 감축을 유도하는 핵심 정책 수단이자, 새로운 시장 메커니즘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국내외에서 탄소배출권의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급등하거나 급락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가격 조작 또는 인위적인 시장 교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배출권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금융세력의 진입이 늘어나면서, 원래의 정책 목적이 왜곡되고 있다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이처럼 가격 투기나 정보 비대칭에 따른 조작 가능성은 탄소배출권 제도에 대한 기업과 시장의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본래 목표 달성에 악영향을 미친다. 이 글에서는 탄소배출권 시장에서 발생 가능한 가격 조작 유형과 그 실태를 살펴보고, 제도적·기술적 신뢰도 확보 방안을 제안한다.
탄소배출권 가격의 왜곡 요인과 조작 의혹 사례
탄소배출권 시장의 가격은 배출권 수요·공급, 정부의 할당 정책, 감축 기술 발전 속도, 기후 이슈, 국제유가 등 다양한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복잡한 변수들 속에서 정보 비대칭과 투기적 거래가 개입되면 가격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시장의 규모가 작거나 거래량이 적은 상황에서는 소수의 참여자만으로도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다.
실제로 유럽 ETS 시장에서는 과거 일부 대형 에너지 기업이 배출권을 대량 매수한 뒤 가격을 끌어올리고, 이후 고가에 되파는 방식으로 수익을 올린 사례가 있었다. 국내에서도 특정 시점에 거래량이 급증하거나, 하루 사이에 가격이 30% 이상 변동하는 경우가 발생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수급 변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움직임이었다. 일부 금융기관이 선물 개념으로 배출권을 보유하면서 시장 기능을 왜곡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정부가 배출권을 무상으로 할당하거나, 경매 제도를 일시 중단하는 경우, 이 정보가 사전에 유출되어 일부 기업 또는 세력이 이를 악용해 거래 전략을 세웠다는 정황도 보고된 바 있다. 이러한 조작 가능성은 시장 전체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지고, 결국 탄소배출권을 감축 수단이 아닌 ‘투기 수단’으로 전락시킬 우려가 있다.
가격 조작이 초래하는 시스템 리스크
탄소배출권 가격 조작은 단순한 시장 왜곡을 넘어, 정책 실패와 기업 간 불공정이라는 구조적 리스크를 초래한다. 예를 들어, 중소 제조기업은 감축 여력이 부족해 시장에서 배출권을 구매해야 하는데,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를 경우 경영 비용이 폭증하면서 기업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또한, 배출권 가격의 급등은 일부 기업에게는 부당한 이익 기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기업이 저가에 배출권을 미리 매수해 뒀다가 가격이 급등한 후 되팔 경우, 감축 실적과는 무관하게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감축 활동 자체를 왜곡시키며, 실질적으로 온실가스를 줄이기보다는 ‘거래 기술’로 이익을 창출하는 방향으로 시장이 흐를 위험성을 내포한다.
더 큰 문제는 시장 신뢰가 무너지면 정부의 정책 수단으로서의 유효성도 저하된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감축 활동보다는 시장 예측에 집중하게 되고, 이는 탄소배출권 제도의 본래 취지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 결국 가격 조작은 단기 이익을 노린 참여자뿐 아니라 전체 시장과 국가의 기후정책 기반을 흔드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로 이어진다.
제도적 신뢰 확보를 위한 규제 및 감시 체계
탄소배출권 가격 조작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거래소 차원의 시장 감시 기능 강화가 필수적이다. 한국거래소(KRX)는 현재 일정 수준의 시장 감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나, 금융시장에 비해 실시간 모니터링 수준이나 이상 거래 탐지 체계는 아직 부족하다. AI 기반 이상 거래 탐지 시스템, 고빈도 거래 탐색 알고리즘, 의심 거래 보고 의무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배출권 거래자격 요건 강화도 필요하다. 단순 투기 목적의 금융기관이나 비사업자들이 무분별하게 시장에 진입하지 않도록, 일정 기준 이상의 실물 배출량 보유자만 참여할 수 있도록 제한하거나, 일정 수준의 책임보고 의무를 부과해야 한다.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기 위한 거래 정보의 투명한 공개도 중요하다. 현재는 기업 간의 실제 거래내역이 모두 공개되지 않거나, 지연 공개되어 정보 접근성이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해 거래량, 가격, 참여자 유형, 계약 조건 등을 실시간 또는 주기적으로 공개함으로써 시장 전반의 감시 체계를 참여자 전원으로 확대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정부는 ‘탄소금융시장’의 투기화를 방지하기 위해 배출권 파생상품 도입 여부에 대해 신중히 접근해야 하며, 만약 도입한다면 이를 별도의 규제 체계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술적 투명성 확보와 민간 참여형 감시 구조 제안
가격 조작을 방지하고 시장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기술 기반의 투명성 강화도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배출권 거래 이력의 공공장부화, 스마트계약을 통한 자동화된 거래 조건 설정은 인위적 개입을 줄이고, 거래의 신뢰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민간 차원의 감시 체계를 제도화하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예를 들어, 비영리 기후단체, 연구기관, ESG 평가기관 등으로 구성된 ‘탄소시장 감시단’을 만들어 비정상적인 거래를 독립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정부나 거래소에 보고하는 구조를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금융감독원이나 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감독기관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시장 감시의 다층화와 민간 거버넌스 확대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정부와 거래소는 시장 참여자에게 ‘이 시장은 감시받고 있다’는 신호를 분명히 줘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투기적 참여자를 줄이고, 제도 본연의 기능인 온실가스 감축 유도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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