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탄소중립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는 제도는 단연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K-ETS)’다. 동시에 기업, 지자체, 민간단체 등이 자발적으로 추진하는 다양한 감축 활동을 공식 인증해 주는 ‘민간 온실가스 감축 인증제도(VE, Voluntary Emission Reduction)’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이 두 제도는 목적과 취지는 같지만, 적용 범위, 감축 실적의 인정 방식, 인증 기관의 구조가 서로 달라 실질적으로 충돌과 중복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특히 감축 실적의 이중 산정, 기업의 전략적 혼란, 제도 간 연계 부족으로 인한 정책 비효율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K-ETS와 민간 감축 인증제도의 구조적 차이를 분석하고, 두 제도가 충돌하는 핵심 쟁점을 살펴본 뒤, 해결을 위한 제도 통합 및 조정 방안을 제안한다.
K-ETS와 민간 감축 제도의 구조적 차이
K-ETS(Korea Emissions Trading Scheme)는 일정 규모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연간 배출량을 할당하고, 이를 초과하거나 남는 만큼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의무적 규제 제도다.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제도이며, 배출권 할당, 거래소 운영, 감축 실적 검증 등이 모두 법적 틀 안에서 이루어진다. 주요 대상은 발전소, 제조업, 정유업 등 고배출 업종이며, 감축 실적은 할당량 대비 실제 감축량으로 계산된다.
반면, 민간 감축 인증제도는 자발적으로 감축 활동을 수행한 기업이나 단체가 그 실적을 정부(환경부 또는 한국환경공단)에 보고하고, 정해진 방법론에 따라 감축 효과를 정식 인증받아 거래하거나 보고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VE 인증은 대부분 K-ETS에 포함되지 않는 중소규모 사업장, 비산업 부문, 지방정부나 민간단체에서 진행되며, 감축 수단도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어, LED 조명 교체, 폐열 회수, 대중교통 활성화 등 다양한 활동이 인증 대상이 된다.
두 제도는 운영 주체, 제도 목적, 감축 대상, 거래 가능성 등에서 구조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언어와 절차로 운영되며, 통합적 전략 수립이 어려운 상황이다.
실적 중복과 이중산정 문제
두 제도 간의 가장 큰 충돌 지점은 감축 실적의 이중산정과 중복 보고 문제다. K-ETS에 포함된 기업이 자사에서 시행한 감축 프로젝트를 VE로도 인증받으려 할 경우, 동일한 실적이 두 제도에 중복 적용되어 ‘이중 크레딧’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는 국제 기준상 허용되지 않는 행위이며, 투명성과 신뢰도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제조업체가 폐열 회수 설비를 통해 온실가스를 줄인 실적을 K-ETS에서 감축 실적으로 보고하면서 동시에 VE 인증을 통해 외부에 판매하려 한다면, 동일한 감축이 두 개의 제도에서 인정되는 셈이 되며, 이는 제도 설계 목적을 훼손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이러한 충돌을 명확히 방지할 수 있는 기술적 기준이나 데이터베이스 연계가 미흡해, 의도하지 않게 이중 산정이 발생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또한, K-ETS에 포함되지 않는 중소기업이나 지자체는 VE 제도만을 통해 실적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배출권 거래 시장에 진입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대적 소외감을 느끼며, 두 제도 간 형평성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구조는 감축 의지를 가진 주체가 오히려 제도 혼란으로 인해 참여를 포기하거나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감축 전략을 설계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기업 혼란과 제도 간 연계 부족
K-ETS와 VE 제도의 병행 운영은 기업 입장에서 큰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 특히 ESG 보고, 기후 공시, 국제 탄소시장 참여 등 외부 이해관계자 요구가 높아지는 상황에서, 기업은 어떤 제도로 어떤 감축 실적을 보고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기 어렵다. 두 제도는 감축 수단별로 인증 방식, 보고 기준, 검증 방식이 다르며, 제도 간 상호 연계나 통합된 가이드라인이 부재하다.
그 결과 일부 기업은 동일한 감축 프로젝트에 대해 K-ETS와 VE 중 어느 제도로 접근해야 더 유리한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을 하지 못하고, 민간 컨설팅 업체의 조언에 의존하거나, 아예 인증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는 감축 활동이 제도적으로 정당하게 평가되지 못하고, 정책 목표 달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 나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ISO 14064나 VERRA, Gold Standard와 같은 글로벌 인증제도와의 연계도 부족하다. 따라서 한국의 VE 인증이 해외 탄소시장 또는 글로벌 ESG 평가기관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이는 한국 기업의 기후경영 국제화 전략에도 제도적 장애물로 작용하게 된다.
제도 통합 및 연계 강화를 위한 개선 방안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K-ETS와 VE 제도를 명확히 구분하되, 데이터, 인증 절차, 보고 체계를 통합하거나 연계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동일한 감축 실적이 이중 산정되지 않도록 통합 감축 실적 등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제도 간 실적 상호 조회가 가능하도록 데이터베이스를 연동해야 한다. 이를 통해 이중 등록을 사전에 차단하고, 정책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감축 활동 유형에 따라 K-ETS 또는 VE 중 어떤 제도가 적합한지 명확히 구분한 가이드라인과 선택 로드맵을 기업에 제공해야 한다. 감축 수단별로 예시와 절차를 상세히 제시하고, 민간 컨설팅사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기업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정보 접근성을 개선해야 한다.
셋째, 정부는 VE 인증을 받은 실적에 대해 일정 기준을 만족할 경우 K-ETS 외부사업으로의 전환 또는 배출권 형태의 거래 가능성을 검토해야 한다. 이를 통해 VE의 실효성을 높이고, 민간 참여를 확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감축 인증제도를 글로벌 탄소시장과 연동할 수 있도록, VERRA, CDM, GS 등 국제 인증 기준과의 정합성 확보도 필요하다. 이는 K-ETS 또는 VE 어느 제도이든 감축 실적이 국내에서만 머물지 않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구조로 연결하는 필수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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